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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를 수장한 돈내보
돈내보(洑)는 보에서 10리 가량 아래에 있는 나산면소재지인 삼축리 앞 들 5백여 정보에 물을 대주는 수리시설로 관개시설로는 큰 것입니다.
이 보는 1968년에 시멘트로 튼튼히 만들어졌지만 그전에는 돌로 만들어졌으면서도 튼튼한 편이었습니다. 일부 자료는 이 보 축조년대를 1592년이라 쓰고 있으므로 사실이라면 4백여년 전 수리시설입니다. 지금 볼 수 있는 시멘트 보는 길이가 60여m로 나산에서 2km쯤 상류에 있으며 삼도-나산간 도로에서 100m거리에 있습니다. 이 보 50m거리에 양수장 건물이 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보의 위치가 물결이 도는 돌머리라 유지 관리의 어려움이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이 보는 1968년에 시멘트로 튼튼히 만들어졌지만 그전에는 돌로 만들어졌으면서도 튼튼한 편이었습니다. 일부 자료는 이 보 축조년대를 1592년이라 쓰고 있으므로 사실이라면 4백여년 전 수리시설입니다. 지금 볼 수 있는 시멘트 보는 길이가 60여m로 나산에서 2km쯤 상류에 있으며 삼도-나산간 도로에서 100m거리에 있습니다. 이 보 50m거리에 양수장 건물이 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보의 위치가 물결이 도는 돌머리라 유지 관리의 어려움이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이 보 밑에서 보의 물을 이용해 물레방아를 돌려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는 이슬비만 내려도 터져버릴 만큼 튼튼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보에 의지해 농사를 짓는 삼축리 사람들은 애를 태웠으며, 물레방앗간 집은 항시 생계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비가 와 보가 터져 또 보수할 것을 걱정하던 삼축리 사람들과 물레방앗간 주인 꿈에 신선이 나타났습니다. "이 곳에 처녀를 제물로 받치지 않는 한 너희는 절대 보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라"고 현몽이었습니다. 이 꿈 얘기는 곧 마을에 퍼졌으나 제수로 받칠 처녀를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물레방앗간에는 돈내라는 착한 딸이 있었습니다. 보가 터질 때마다 생계가 위협을 받는 가정형편과 보 공사에 바칠 처녀 때문에 수심에 잠겨있는 아버지를 생각한 효녀 돈내는 아버지 몰래 보에 나아가 스스로 투신자살 했습니다.이후부터 보는 3백여년간 터질 줄 몰랐고 사람들은 이 보를 ‘돈내보’라 불러 그 처녀의 효성을 기렸습니다.
이 보 이름에 대해 일설에는, 원래 나산천을 도천이라 불렀는데, 도천이라 한 것은 물이 돌아 빠져 ‘돌내’ 또는 ‘돈내’라 하던 것을 한자화 한데서 연유합니다.
또 다른 전설은 보가 자주 터져 고심하고 있었는데, 한 도승이 지나다가 그 사정을 듣고 용왕님께 처녀 제수를 올려야 괜찮을 것이라 일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산사람을 제물로 바치라는 얘기를 듣고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이 무렵 여아를 등에 업은 걸인 여인이 마을에 들어오자 이 여인에게 돈을 주고 여아를 사서 제물로 바쳤는데, 그 걸인 여인은 벼락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한편에서는 박 첨지라는 사람이 동네 일을 위해 자기 딸 도례를 제물로 바쳐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돈내보는 여아를 수장시켜 만든 보라 비가 오면 봇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처녀가 우는 것 같고 ‘돈내’ ‘돈내’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도 합니다.
이와는 달리 1972년 9월 함평군 교육청이 민속문화교육자료집으로 발간한 이 보의 전설은 사연이 좀 다르고 많이 각색된 듯 싶으나 소개합니다.
옛날 나산에 가난한 노부부가 뒤늦게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이 부부는 이 아이가 여섯살 나던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제동이었습니다. 제동이는 고아가 되어 걸식하던 끝에 어느 부자집 초동으로 들어가 자랐습니다. 제동이는 나이 30이 되도록 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머슴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뒤늦게 주인집 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그녀마저 부모들이 정해준 이름난 가문으로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사랑을 잃은 제동은 자기 신세를 비관하고 마을 앞 보에 나가 투신자살해버렸습니다. 제동이가 보에 빠져 죽고 부터 이 보는 이슬비만 내려도 터져버렸습니다. 이 보의 물로 농사를 짓던 아랫마을 사람들은 비온 뒤마다 보를 다시 막아야 하는 일이 큰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의 보수사업에 동원되던 마을사람들 꿈에 제동이가 나타나 "총각으로 죽어 원혼을 씻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불쌍히 죽은 나를 위해 예쁜 처녀 하나만 보내주면 다시는 보가 터지지 않도록 해주겠습니다."고 말하고 사라졌습니다.
이튿날 보 보수에 나온 사람들은 원혼을 달래기 위해 처녀 구할 일을 걱정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보 밑 물레방앗간집 착한 딸 돈내가 마을과 부모를 위해 투신자살했고, 이후부터 보가 터지는 일이 없어졌으며 보의 이름이 '돈내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보에서 2km가량 상류에 물레방아터가 있습니다.
물레방앗간에는 돈내라는 착한 딸이 있었습니다. 보가 터질 때마다 생계가 위협을 받는 가정형편과 보 공사에 바칠 처녀 때문에 수심에 잠겨있는 아버지를 생각한 효녀 돈내는 아버지 몰래 보에 나아가 스스로 투신자살 했습니다.이후부터 보는 3백여년간 터질 줄 몰랐고 사람들은 이 보를 ‘돈내보’라 불러 그 처녀의 효성을 기렸습니다.
이 보 이름에 대해 일설에는, 원래 나산천을 도천이라 불렀는데, 도천이라 한 것은 물이 돌아 빠져 ‘돌내’ 또는 ‘돈내’라 하던 것을 한자화 한데서 연유합니다.
또 다른 전설은 보가 자주 터져 고심하고 있었는데, 한 도승이 지나다가 그 사정을 듣고 용왕님께 처녀 제수를 올려야 괜찮을 것이라 일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산사람을 제물로 바치라는 얘기를 듣고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이 무렵 여아를 등에 업은 걸인 여인이 마을에 들어오자 이 여인에게 돈을 주고 여아를 사서 제물로 바쳤는데, 그 걸인 여인은 벼락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한편에서는 박 첨지라는 사람이 동네 일을 위해 자기 딸 도례를 제물로 바쳐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돈내보는 여아를 수장시켜 만든 보라 비가 오면 봇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처녀가 우는 것 같고 ‘돈내’ ‘돈내’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도 합니다.
이와는 달리 1972년 9월 함평군 교육청이 민속문화교육자료집으로 발간한 이 보의 전설은 사연이 좀 다르고 많이 각색된 듯 싶으나 소개합니다.
옛날 나산에 가난한 노부부가 뒤늦게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이 부부는 이 아이가 여섯살 나던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제동이었습니다. 제동이는 고아가 되어 걸식하던 끝에 어느 부자집 초동으로 들어가 자랐습니다. 제동이는 나이 30이 되도록 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머슴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뒤늦게 주인집 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그녀마저 부모들이 정해준 이름난 가문으로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사랑을 잃은 제동은 자기 신세를 비관하고 마을 앞 보에 나가 투신자살해버렸습니다. 제동이가 보에 빠져 죽고 부터 이 보는 이슬비만 내려도 터져버렸습니다. 이 보의 물로 농사를 짓던 아랫마을 사람들은 비온 뒤마다 보를 다시 막아야 하는 일이 큰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의 보수사업에 동원되던 마을사람들 꿈에 제동이가 나타나 "총각으로 죽어 원혼을 씻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불쌍히 죽은 나를 위해 예쁜 처녀 하나만 보내주면 다시는 보가 터지지 않도록 해주겠습니다."고 말하고 사라졌습니다.
이튿날 보 보수에 나온 사람들은 원혼을 달래기 위해 처녀 구할 일을 걱정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보 밑 물레방앗간집 착한 딸 돈내가 마을과 부모를 위해 투신자살했고, 이후부터 보가 터지는 일이 없어졌으며 보의 이름이 '돈내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보에서 2km가량 상류에 물레방아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