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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영수
함평은 함풍과 모평을 합해 현을 만들어 1409년부터 불러진 이름입니다.
함평은 예부터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되었고 특히, 쌀 맛이 좋고 질이 좋아 '함평 쌀밥만 먹은 사람은 상여도 더 무겁다'라는 속담이 나올 정도입니다. 함평에는 명산과 깊은 골짜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함평에는 기산영수로 불리는 명승지가 있습니다. 함평읍의 주산과 그 산을 감돌아 흐르는 함평천을 중국 하남성 동봉현의 전설적인 땅에 비유하여 기산영수라 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는 요순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요는 BC2367년에 산서성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50년간 왕위에 올라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 임금때 같은 태평성세에도 세속을 싫어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소부와 허유는 세상을 등지고 하남성 기산에 숨어 살았습니다. 요임금은 단주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그 아들이 어질지 못해 임금자리를 물려줄 사람을 찾던 중 기산에 숨어사는 소부와 허유가 그 자리를 맡을 만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요임금은 사람을 기산에 보내 그의 의향을 전했습니다. 소부가 이 말을 전해 듣자 펄쩍 뛰며 사람을 되돌려 보낸 뒤 기산 밑 영수에 귀를 씻었습니다.

마침 이때 소에게 물을 먹이려 이 냇가에 내려온 허유는 소부가 귀를 씻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소부가 가로되 "나더러 임금자리를 맡으라니 그 소리를 들은 이 귀가 불결하여 씻는다."하므로 허유는 끌고 왔던 소를 소부가 귀씻고 있던 냇 윗쪽으로 몰고가면서 "나는 미물인 소에게도 소부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먹일 수 없다."고 했다고 전해옵니다. 실제로 이 두 인물이 살았던지는 알 수 없으나 후대에 기산영수 하면 이 두 인물을 관련지어 생각하는 전설적인 지명입니다.

사람들은 함평공원 부근의 내와 함평읍의 주산을 언제부터 기산영수라 부른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곳에, 조선 세조때 단종 왕위 찬탈을 못마땅히 여기고 벼슬을 마다하여 이 곳에 정각을 짓고 살았던 인물이 있었으므로 그가 지은 이름이 아닐까 생각할 뿐입니다.

세조때 이곳에 영파정이란 정각을 짓고 은둔한 인물은 함풍이씨 이안이란 사람인데, 그의 할아버지 이희림은 청주판관을 지냈고 아버지는 제학을 지낸 연고로 단종2년에 박팽년의 추천으로 남부참봉에 특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더러운 세상이라고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함평에 내려와 정각을 짓고 '루(樓)가 높아 날아가는 기러기는 등만 보이고 루 아래물이 맑아 헤엄치는 새우의 수염을 헤아리겠다'고 시를 읊으며 기산지지(箕山之志)의 생활을 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조정에서 그의 인품을 알고 사헌부장령 벼슬을 내렸으나 자신을 소부와 허유에 비유하여 벼슬 않고 지내다 30년만인 147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모두 벼슬길에 나서 아들은 정5품인 부사직 벼슬을 했고 증손 대에서는 대사간 벼슬을 지내는 등 명문을 이루었습니다.

영파정은 이후로 세월이 흘러 퇴락해 흔적만 남은 것을 1821년 그 자리에 다시 정각을 짓고 영수정이라 했고 1843년 다시 중수하여 관덕정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이 영수천 곁에는 관덕정이 보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1966년에 보수한 것입니다. 냇 건너에 과녘을 설치하고 활을 쏘는 궁도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영수천 직강공사로 과녘이 멀어지자 궁도장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기산은 원래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산줄기를 이르는 산에 붙는 이름으로 함평읍 뒷산 전체를 이르지만 그 산맥이 읍에 이르고 이 산 모퉁이에 함평천이 흘러 이를 중국의 기산 및 영천에 비유해 영수라 했음직합니다. 어쨋든 함평 사람들은 이 기산의 지조를 고을 정신으로 이어 받아 왜적에 협력하지 않는 고을로 이름났기 때문에 삼평삼성중 한 고을로 꼽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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