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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신(魯 愼)
1336~? 본관 함평. 첫 이름 철(哲). 호 귀은(歸隱) 또는 악은(岳隱). 시호 무열공(武烈公). 시조의 7세손. 여희(汝姬)의 아들. 공민왕 초에 음사로 감무(監務. 조선조의 현감과 같은 직책)에 배명되고 이어 정윤상호군(正尹上護軍)을 역임했는데 마음이 곧고 일에 거짓이 없어 조정에서 유능한 관리로 여겼다.
1359년(공민왕8) 홍건적이 모거경(毛居敬)을 장수로 침입하여 의주, 서경(西京. 평양)을 빼았고 왕이 복주(福州)에 피신함에 이성계(李成桂), 안우경(安遇慶)과 함께 적과 싸워 적장 사유관(沙劉關)을 비롯 많은 적병을 사살하는 공을 세우고 난을 평정, 1등공신에 올랐으며 1360년 김용(金鏞)의난 때는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록되고 함풍군(咸豊君)에 봉작되었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하자 그는 40명의 동지와 보봉산(寶鳳山) 아래서 관복을 벗고 두문불출하였다. 판서 김충한(忠漢)이 남원으로 귀양감에 오히려 부럽다는 시를 부치고 민농은(閔農隱) 에게도 글을 보낸 뒤 채읍인 함평으로 돌아와 월야면 월악리에 거주하였는데 “철(哲)”이라는 처음 이름을 “신(愼)”으로 고쳐 “신종(愼終)”의 뜻을 표했고 처음의 호인 “귀은(歸隱)”을 “악은(岳隱)”으로 고쳐 송악(松岳)을 잊지 않으려했고 매월 한 번씩 송도 쪽을 향해 곡배 하였다그가 타계하자 조정에서 시호를 내렸고 수찬 방귀온(房貴溫)이 행장을 지었으며 개성의 경현사(景賢祠), 나주시 문평의 거평사(居平祠), 무안군 해제면의 학산사(鶴山祠), 영암군 서호면의 관봉사(冠峰祠)에서 배향하였다. 묘는 월악에 있다고 하였으나 실전하고 1960년에 아들 유안(有顔)의 묘소를 새로 꾸미면서 좌상편에 설단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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