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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덕(盧憬德)
1562~1612 본관 광산. 자 사원(士元). 호 영보(潁甫). 시조의 27세손. 동래부사(東萊府使) 사종(嗣宗)의 손자. 참봉 언명(彦明)의 아들.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용력과 충효의 정신이 투철하였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국가가 무사할 때 벼슬을 탐내어 부모를 잊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며 사직이 위태로울 때 삶을 탐내어 임금을 버림 또한 옳은 일이 아니다” 라며 의병을 모아 함평성(咸平城)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함평현감 이극성(李克誠)이 의병 수천을 이끌고 영남으로 떠나며 경덕의 적기충정한 의기를 보고 수성장(守城將)을 맡겼다.
그는 군기와 군량을 모으고 기산성을 튼튼히 하는데 힘을 기울이던 중 팔양치(八良峙)의 관군과 의병들이 식량이 끊겨 매우 위급한 상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성장을 김전재에게 맡긴 후 아들 원명(遠命), 원치(遠致), 원발(遠發)과 가동 수십명, 그리고 의병 수백명과 함께 팔양치로 군량을 운반하고 그들 군사와 합세하여 여러 차례 승전을 하여 곤경에서 벗어나게하였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불행하게도 함평성읍 전체가 적에게 분탕되어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 후 그는 왜적의 손에 의해 불타고 노복들이 모두 도망친 함평 향교(당시 함평읍 내교리 외대화 소재)를 다시 세우기 위해 영건 도유사(營建都有司)를 맡아 자비로 제향을 받들고 자기집 노복들을 교직(校直)으로 삼게하는 등 향교 재건에 온 힘을 썼다. 이러한 공으로 후일 병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증직되었다
그는 군기와 군량을 모으고 기산성을 튼튼히 하는데 힘을 기울이던 중 팔양치(八良峙)의 관군과 의병들이 식량이 끊겨 매우 위급한 상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성장을 김전재에게 맡긴 후 아들 원명(遠命), 원치(遠致), 원발(遠發)과 가동 수십명, 그리고 의병 수백명과 함께 팔양치로 군량을 운반하고 그들 군사와 합세하여 여러 차례 승전을 하여 곤경에서 벗어나게하였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불행하게도 함평성읍 전체가 적에게 분탕되어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 후 그는 왜적의 손에 의해 불타고 노복들이 모두 도망친 함평 향교(당시 함평읍 내교리 외대화 소재)를 다시 세우기 위해 영건 도유사(營建都有司)를 맡아 자비로 제향을 받들고 자기집 노복들을 교직(校直)으로 삼게하는 등 향교 재건에 온 힘을 썼다. 이러한 공으로 후일 병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