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8~1534 본관 광산. 자 점실(点悉). 시조의 23세손. 세준(世俊)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보령, 진해현감을 지냈다. 아내는 나주김씨 득강(得强)의 딸이다.
|
|
본관 김해.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
|
|
1574~1644 본관 금성. 자 연보(連寶). 호 송파(松坡). 시조의 22세손. 충순위 시남(詩男)의 아들로 문장에 천재성을 보였으며,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깨어 피를 넣어드리고 똥 맛을 보고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행이 참으로 지극하였고 이에 1608년 나라에서 효행으로 창릉(昌陵) 참봉을 제수하였다. 50세에 이…
|
|
1565~1635 본관 나주. 자 면지(勉之). 호 은봉(隱峯). 긍천현감(矜川. 현 시흥) 사율(士慄)의 아들로 통덕랑을 지냈다. 정유재란을 피하여 아들 3형제를 거느리고 나주시 향교동에서 신광면 함정리 구봉으로 이거 정착하였다. 아내는 영광정씨(丁氏) 진사 세린(世麟)의 딸이다.
|
|
1548~? 본관 금성. 자 이건(以健). 호 사담(沙潭). 시조의 21세손. 참봉 열(悅)의 아들. 곤재 정개청(困齋鄭介淸)의 문하생이며 학문과 덕행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1573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세마(洗馬)에 임명되었다.
1580년경 잠시 이거하였던 무안군 삼향에서 함평군 학교면 금송리(錦松里. 당시 무안현)로 이…
|
|
본관 금성. 1645년 함평읍 내교리 외대화 에서 대동면 향교리로 함평향교를 옮겨 지을 때 영건 별감(營建別監)을 맡았다.
|
|
본관 금성. 자 질부(質夫). 시조 19세손. 욱(郁. 1443년생) 의 셋째 아들로 장사랑(將仕郞)을 지냈으며 1500년경 나주시 문평에서 함평읍 가동리 가동으로 이거하여 정착했다. 아내는 밀양박씨 현감 형산(亨山)의 딸이다.
|
|
본관 금성. 1663년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를 지냈다.
|
|
본관 금성. 1663년(현종 4)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을 지냈다.
|
|
1581~1659 본관 금성. 자 탁이(卓爾), 호 청류(淸流) 또는 타우(打愚). 시조의 23세손. 선무랑 창서(昌緖)의 양아들(생부 茂松)로 판서 조강중(趙綱仲)이 두보(杜甫)에 비길만한 문장가라고 칭송 할 만큼 당대 호남에서 이름 높던 문장가로 인조조에 조산대부 동몽교관(朝散大夫童蒙敎官)을 제수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
|
|
나정양(羅廷良) 1788~1849, 나정우(羅廷佑) 1789~1837, 나정륜(羅廷倫) 1792~1839
본관 금성, 득일(得一)의 아들들이다. 3형제는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자 서로 앞 다투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넣어드렸고 상을 당하자 여막에서 같이 생활했다.어머니를 모시되 3형제가 한 집에서 같…
|
|
본관 금성. 고종 때 문과에 급제
|
|
본관 광산. 죽산 안천섭의 아내로 나산마을 앞에 열부비를 세웠다.
|
|
1562~1612 본관 광산. 자 사원(士元). 호 영보(潁甫). 시조의 27세손. 동래부사(東萊府使) 사종(嗣宗)의 손자. 참봉 언명(彦明)의 아들.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용력과 충효의 정신이 투철하였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국가가 무사할 때 벼슬을 탐내어 부모를 잊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며 사직이 위태로울 때 삶을 …
|
|
1571~1610 본관 광산. 자 언서(彦瑞). 시조의 24세손. 통덕랑 대수(大壽)의 맏아들. 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宣傳)을 지냈다. 아내는 기계유씨(兪氏)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