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나덕원(羅德元)
1548~? 본관 금성. 자 이건(以健). 호 사담(沙潭). 시조의 21세손. 참봉 열(悅)의 아들. 곤재 정개청(困齋鄭介淸)의 문하생이며 학문과 덕행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1573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세마(洗馬)에 임명되었다.
1580년경 잠시 이거하였던 무안군 삼향에서 함평군 학교면 금송리(錦松里. 당시 무안현)로 이거하여 금성나씨 이조판서공파 함평입향조가 되었다. 임진란때 소모사(召募使)로 의병을 모집 황진(黃進)의 막하로 보내고 다시 의병 천여명을 모아 여산(礪山)으로 들어가 각처에서 모인 의병과 합세하여 의주(義州)로 출병하려다가 왕이 환
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1594년 오수(獒樹)찰방에 제수되고 겸하여 군량을 보내는 것을 감독하였고 이어 함창 현감(咸昌縣監) 겸 운량차사(運糧差使)로 임명되어 명군(明軍)의 군량을 보급하였다. 또 모두포(毛豆浦)에 주둔한 가등청정(加藤淸正)을 공격하기 위하여 찬획사 황신주(贊劃使黃愼周)와 함께 군사를 인솔 유곡역으로 들어가 있다가 명장 마귀를 도와 울산에 진격하였으나 가등청정이 화평이 되자 포위망을 풀었다. 화평 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아우 덕립(德立)은 울산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문집 “사담집(沙潭集)”이 전하며, 아내는 청주곽씨(淸州郭氏) 문양공 추(文良公樞)의 후손이다.
1580년경 잠시 이거하였던 무안군 삼향에서 함평군 학교면 금송리(錦松里. 당시 무안현)로 이거하여 금성나씨 이조판서공파 함평입향조가 되었다. 임진란때 소모사(召募使)로 의병을 모집 황진(黃進)의 막하로 보내고 다시 의병 천여명을 모아 여산(礪山)으로 들어가 각처에서 모인 의병과 합세하여 의주(義州)로 출병하려다가 왕이 환
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1594년 오수(獒樹)찰방에 제수되고 겸하여 군량을 보내는 것을 감독하였고 이어 함창 현감(咸昌縣監) 겸 운량차사(運糧差使)로 임명되어 명군(明軍)의 군량을 보급하였다. 또 모두포(毛豆浦)에 주둔한 가등청정(加藤淸正)을 공격하기 위하여 찬획사 황신주(贊劃使黃愼周)와 함께 군사를 인솔 유곡역으로 들어가 있다가 명장 마귀를 도와 울산에 진격하였으나 가등청정이 화평이 되자 포위망을 풀었다. 화평 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아우 덕립(德立)은 울산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문집 “사담집(沙潭集)”이 전하며, 아내는 청주곽씨(淸州郭氏) 문양공 추(文良公樞)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