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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상산. 호 수졸재(守拙齋). 숙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성현령, 예조정랑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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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1849 본관 광산. 호 모헌(慕軒). 문숙공 18세손. 시조의 31세손. 의석의 아들. 16세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절지주혈(切指注血)하였고 37세 때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또 단지(斷指)하였으며 5리 밖에 묘를 쓰고 3년간 조석으로 성묘하니 묘앞에 꿇어 엎딘 자리가 오목히 패이고 홀린 눈물로 풀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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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몽성의 손자. 시조의 28세손. 164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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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1893 본관 선산. 처음 이름 두용(斗容). 자 성진(聖珍). 호 적계(翟溪). 시조의 31세손. 백련(百鍊)의 아들. 효우돈목하고 성리학에 밝았으며 향리에 덕을 베풀어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으며 1876년 효로 등천되어 감찰을 제수 받았다. 아내는 경주이씨 규한(圭翰)의 딸로 남편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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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김해. 속의 다섯째 아들. 숙종조 무과에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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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 본관 선산. 자 사순(士純). 시조의 29세손. 득추(得秋)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아내는 평택 임씨(平澤林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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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선산. 정종조(正宗朝). 자 덕승(德承). 호 우재(遇齋). 용암 석규의 후예. 15세에 벌써 중용에 능하여 정밀한 경지에 이르러 기상이 넘쳐흐르니 세인이 점필재의 행적을 닮았다고 칭송했다. 그가 안성에 들어갔을 때 민승천(閔承天)이 의병을 일으켜 대장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2진이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경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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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주. 1870.9. 16~1908. 4. 25 일명 준, 태중(準, 太仲). 참봉(參奉) 호 죽봉(竹峯). 나주시 문평면 갈마리(葛馬里)에서 태어나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水上里)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지략과 용맹이 뛰어났으며 벼슬은 순릉참봉(順陵參奉)에 그쳤으나 국운이 기울어져 매 국사(國事)에 부심하였다.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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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주. 문기(文起)의 7세손. 1675년 경남의 안음에서 월야면 외치리로 이거 정착하여 경주김씨 함평군 입향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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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6~1687. 본관 상산. 호 선계당(善繼堂). 충간공 덕생(德生)의 8대손. 1675년(숙종 원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용강현령(龍岡縣令)을 지내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병조좌랑을 거쳐 예조좌랑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을 겸임하였다. 1686년 민정중(閔鼎重)을 비롯하여 당대명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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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자 시망(時望). 문숙공 주정(文肅公 周鼎)의 후손. 훈도 천종(訓導天鍾)의 아들. 158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냈다. 임진란때 선조대왕을 호위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환궁 후 부하들을 인솔하여 부녕(富寧)에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참살했으며 당시 빼앗은 왜적의 칼이 전해온다. 아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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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김해. 속의 넷째 아들. 숙종조 무과에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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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 본관 고성. 자 광보(光甫). 호 남암(南巖). 시조의 38세손. 명(明)의 아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154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숙릉(淑陵)참봉을 지냈다. 아내는 광산김씨 경휘(敬輝)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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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1802 본관 선산. 처음 이름 용려(用礪). 자 공호(公浩). 호 영모재(永慕齋). 시조의 30세손. 치달(致達)의 둘째 아들. 성재 허전(性齋許傳)의 문하생으로 1781년에 대흉년을 만나 기아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조정에 알려 특히 백미 3천석을 내리게 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이 공으로 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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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 본관 김해. 호 신재(愼齋). 금령군 21세손. 인식의 아들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부모 앞에서 절대 난색을 표한 일이 없고 아버지 병환에 단(壇)을 쌓고 쾌차하기를 기원하니 노루가 나타나 잡아서 간호했다. 상을 당해서는 3년간 시묘살이를 했으며 신광면 원산리(元山里)에 효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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