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본문

김 율(金 聿)
1881~1908. 4. 25. 본관 경주. 형 태원(泰元)의 우국충정어린 권고에 기삼연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처음에는 군사(軍士)에 불과하였으나 일찍이 많은 한서(漢書)를 탐독하였고 문필과 담력이 뛰어나 기삼연이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하여 호남창의대장이 되었다. 일인의 기록인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에 그가 거괴(巨魁)로 수록되어 있고 그를 처단 하고 난보고문에 “-전략- 연령 27세. 한서를 읽고 다소문필에 능하다. 스스로 박사라 칭하고 성품이 완미(頑迷)하고 항상 배일사상을 품고 조선의 대관이 일본에 아부하여 3천년 예의의 고국(古國)을 판다고 개탄. 융희 원년(1907) 11월 거괴 기삼연 및 형 김태원 등과 호응하여 도당을 모아 그 세력이 한창일 때는 부하가 200여명에 이르렀다. 1908년 3월 함평군 죽산(竹山. 현 월야면 월야리 대매)에서 우리 토벌대와 싸워 크게 패해 세력이 약화되었고 드디어 광주군 소지면(所旨面.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생포되었는데 4월 25일 도주를 꾀하다 총살되었다.”라고 하였다. 그의 의병활동을 간추려 보면(이하 월일 중 음력표시 외는 모두 양력임), 1908년 1월 3일. 부하 100여명을 이끌고 함평주재소를 습격순사 2명, 우편 취급소장 및 채류 일인 2명과 교전 그들을 학교면까지 쫓았으며 소지품을 모두 노획하고 응원부대가 도착하자 나산으로 피해 다시 격전을 벌이다가잠적하였다. 폭도사에 “1월 상순부터 중순까지 함평, 영광에 집단이 배회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집단이 바로 그
의 부대로 보고 있다. 1월 상순. 배일 격문을 돌리고 일인 관민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이후 수 십차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적에게 타격을 주었다. 1월 22일. 김태원부대와 연합하여(부대원 400여명) 재차 함평주재소를 습격 8시간 동안 교전하여 파다야(波多野. 하다노) 순사를 살해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리고 절골(현 함평읍 대사동)쪽으로 빠져 잠적하였다. 1월 1일(음). 창평 무동촌(舞童村)에서 김태원이의병토벌대장 길전(吉田)을 살해한 후 그
부대원 100여명과 교전중일 때 구원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3월. 월야면 월야리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 3월 29일. 오후 1시금촌(今村, 이마무라), 이웅(伊熊, 이마구)양 중위가 이끄는 토벌대와 광주군 소지면 정동(鼎洞.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1시간 동안 교전을 하다 소지면 신기리(新基里)에서 적에게 사로 잡혔다. 4월 25
일. 박산(博山)마을의 어등산(魚等山)에서 적에게 사살된 형 태원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연행되던 중 도주를 기도하다가 적에게 사살되었다. 그는 형 태원의 그늘에 가려 지금껏 그의 공적이 널리 알려진바 없는데 형의 공적에 비해 손색이 없는 의병장으로 후세에 널리 추앙되어야 할 것이다
주소 57147 전라남도 함평읍 기산길 163-16 전화 061) 322-0505, 324-4001 팩스 061) 322-0656
COPYRIGHT © 2024 hampyeong culture center hpcc.or.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