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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각(羅 珏)
1574~1644 본관 금성. 자 연보(連寶). 호 송파(松坡). 시조의 22세손. 충순위 시남(詩男)의 아들로 문장에 천재성을 보였으며,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깨어 피를 넣어드리고 똥 맛을 보고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행이 참으로 지극하였고 이에 1608년 나라에서 효행으로 창릉(昌陵) 참봉을 제수하였다. 50세에 이르렀을 때 북방 변방에 금인(金人)들이 자주 침입하자 장만의 휘하에서 변방을 지켰으며 병자호란 때는 사위 이시우(李時佑)와 의병을 일으켜 출전하던 중 전주에서 강화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돌아왔다. 은거중이던 그에게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이 제수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가천사(佳川祠. 함평읍 가동리 소재)에서 배향하며 유고 “송파록(松坡 錄)”이 전한다. 아내는 면성(綿城. 무안)박씨 언순(彦純)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