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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2~1541 본관 영산. 시조의 16세손. 군수 함의 맏아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며 아내는 함양박씨 경술(慶述)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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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1597 본관 평산. 자 군경(君卿). 시조의 21세손. 시직정(侍直挺)의 손자. 세형(世衡)의 아들. 1585년경 전북 남원에서 대동면 연암리에 이거 정착하여 평산신씨 함평 입향조가 되었다.
그는 음사(蔭仕)로 참봉에 오르고 임진란때 창의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모아 금산(錦山)의 의병진과 합류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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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영산. 시조의 16세손. 군수 함(諴)의 둘째 아들. 몽남의 아우며 통덕랑을 지냈고 아내는 곽씨(郭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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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1~1770 본관 고령. 오위청 용양위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는데 이를 증명 할 1764년에 발부한 교지를 후손 도수(道秀)가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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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영산. 진사 유장(裕章)의 아들. 성균관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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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평산. 임진왜란 때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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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1562 본관 고령. 자 경윤(景允). 호 정양재(靜養齋). 시조의 11세손. 우참찬이며 청백리인 공제(公濟)의 아들. 여절교위(勵節校尉), 부사직을 역임했고 1550년경 학교면 금송리에 이거 정착하여 고령 신씨 함평군 입향조가 되었다. 아내는 전주리씨 만형(晩馨)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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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고령. 자 윤지(允之). 현감 격(激)의 아들. 임진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사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록에 책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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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1635 본관 평산. 자 성보(成甫). 시조의 22세손. 참봉 반(磐)의 아들. 정유재란 때 창의한 아버지를 따라 금산으로 가던 중 적을 만나 접전하다가 아버지가 적탄에 맞아 팔이 부러져 말에서 떨어져 사로잡히자 아버지 대신 자기를 죽여달라고 자청하매 적이 이를 의롭게 보고 놓아 주었으며 다시 유지경(柳持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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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영산. 성균관진사를 지냈으며 1847년 소암사를 창건하고 배향하였으나 1868년 훼철하고 아직 복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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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영산. 시조의 15세손. 부사 효돈(府使 孝敦)의 아들. 고창현감,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냈고 익산군에 유애비(遺愛碑)가 있으며 연산군의 폭정에 벼슬을 버리고 전국을 돌다가 1500년경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松岩里)에 정착하여 영산신씨 함평입향조가 되었다. 대곡 성운상(大谷成運相)과 친하였고 서로 시를 많이 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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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청송. 호 규암(葵菴). 시조의 11세손. 부사 직전의 아들. 1587년(선조 20)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도시정(司道侍正), 훈련원부정(副正)을 거쳐 1640년에 수찬(修撰), 지제교(知製敎), 1654년에 봉사(奉使)로 중원을 다녀왔다. 1610년경 장성에서 함평군 신광면 복흥리(伏興里)로 이거 정착하여 청송 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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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청송. 시조의 12세손. 수찬 안평(安枰)의 둘째 아들. 장사랑 순민(將仕郞舜民.1593년생)의 아우로 통덕랑을 지냈으며 아내는 진주강씨 참봉 극검(克儉)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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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청송. 숙종조(肅宗朝). 자 여효(汝孝). 호 효당(孝堂). 청송백 덕부의 후예. 흉년에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며 효당(孝堂)을 짖고 후진을 가르치며 거상(居喪)에 슬픔이 지나쳐 피골이 상접하니 원근(遠近)이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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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청송. 1600~? 자 정국(正國). 호 성재(惺齋). 시조의 12세손. 수찬 안평의 넷째 아들로 지기(志氣)가 강개하였고 충의교위(忠毅校尉)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창의하여 남한산성의 광을 도우려 출병하였으나 도중에서 강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 귀항하였다. 아내는 현풍곽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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