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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學生) 서중원(徐中元)의 아내인데 지아비가 범에게 잡혀가게 되자 범을 때려 쫓고 지아비를 구했으나 역시 범에게 다쳐서 곧 죽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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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무안. 임진란때인 1592년 7월 영동(永同), 황간(黃澗)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진주성(晋州城)을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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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8~? 본관 무안. 1513년(중종 8)사마시 진사과에 입격하여 경릉(敬陵) 참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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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 본관 밀성. 처음 이름 시매(時邁). 자 윤길(胤吉). 시조 언상의 20세손. 부사 용조(龍祚)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광주 중군(廣州中軍)을 지냈으며 1720년대에 나산면에서 나주시 봉황면으로 이거 정착하였다. 아내는 광산김씨 상언(相彦)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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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 본관 밀성. 일명 세룡(世龍). 자 이장(以章). 시조 언상의 19세손. 좌랑 만영(萬永)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철성부사(鐵城府使)를 지냈다. 아내는 광주(廣州)이씨 세성(世成)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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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1597 본관 밀양. 처음 이름 언(彦). 자 득서(得瑞). 시조의 25세손. 참봉 수연(水淵)의 셋째 아들. 정유재란 때 방어사 정황수(鄭凰壽)를 따라 절영도(絶影島)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나타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아내는 광산김씨 경수(景秀)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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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 본관 밀성. 자 방실(邦實). 시조의 17세손. 현령 상경(尙敬)의 셋째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병마 우후(虞候)를 지냈다. 아내는 한산 이원량(李元良)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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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본관 밀양. 자 무정(茂亭). 호 송암(松菴). 현감 춘(春)의 손자. 참봉 길손(吉孫)의 아들로 1586년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를 지냈다. 임진왜란에 금산으로 출전하여 많은 적을 참살하고 분전했으나 끝내 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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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 본관 밀양. 자 준여(俊汝). 시조의 26세손. 첨정 이상(以祥)의 맏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를 지냈으며 공신록에 오른 자손이라하여 도총부 도사(都事)에 특채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아내는 광산김씨 참봉 부행(副行)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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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8~? 본관 밀양. 자 경여(慶汝). 시조의 26세손. 첨정 이상(以祥)의 셋째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익위사 만호(翊衛司萬戶)에 올랐으며 같이 등과한 민효선(閔孝善), 백경선(白慶善)을 이름 끝에 “선(善)”자가 붙었다하여 호남의 “삼선(三善)”이라 불렀다. 정유재란 때 순국한 아버지와 동생의 원수를 기필코 갚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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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1598 본관 밀양. 자 충여(忠汝). 시조의 26세손. 첨정 이상(李祥)의 둘째아들. 임진란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에 방어사 정황수(鄭凰壽)를 따라 목포, 다경(多慶)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이순신 휘하로 달려가 적과 여러번 싸웠으며 노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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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1597 본관 밀양. 자 득후(得厚). 환학정(喚鶴亭). 시조의 25세손. 참봉 수연(水淵)의 아들. 1591년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 주부를 역임했고 임진란을 당하여 의병 수십명을 모집하여 조방장 곽영(助防將郭嶸)을 도와 공을 세우고 이순신 군진으로 들어가 첨정(僉正)이 되었다. 정유재란에 이억기 군진에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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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무안. 헌종조(憲宗朝). 자 평서(平瑞). 호 해산(海山). 진사 언휘의 후손. 재질이 뛰어나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경사의 이치를 탐구하여 향리의 인재를 길러내니 사림이 추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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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밀양, 정선(旌善)현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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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밀양. 호 가천(佳川). 고창현감을 역임했으며 그의 호가 가천이어서 가동리(佳洞里)를 지금도 가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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