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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1689 본관 이천. 자 이중(以仲). 시조의 24세손. 좌랑 상지(尙志)의 둘째 아들로 민노봉(閔老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효로 천거되어 지평(持平)을 지내던 중 1689년 서인 축출 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투옥되고 불 고문까지 당한 후 노량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 도착하여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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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 본관 이천. 자 명신(命新). 호 야은(野隱). 중조의 19세손. 명유(明儒)의 양아들로 정릉 참봉으로 출사하여 중추원 의관(議官)을 지냈다. 아내는 금성 정태신(丁泰信)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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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9~? 본관 이천. 자 원지(元祉). 시조의 12세손. 기성군 희찬의 아들. 검교사인(檢校舍人)을 지냈으며 아내는 안동권씨 하주(夏周)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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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1892 본관 이천. 자 응사(應士). 시조의 34세손. 효자 명선(明先)의 아들. 수직으로 용양위 부호군을 제수 받았으며 1830년경 영광군 군남에서 나산면 구산리로 이거 정착하여 그 후손이 나산면 일대에 퍼져 살고 있다. 아내는 화순오씨 도삼(道三)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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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달성. 시조의 14세손. 세방의 아들.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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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1524 본관 이천. 자 운호(雲浩). 시조의 18세손. 장령 순지(順止)의 아들이며 대언(代言. 승지-承旨-로 바뀜)으로 있다가 연산조의 혼정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 하였다. 아내는 함안 박세광(朴世光)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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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9~1409 본관 이천. 자 경심(敬心). 시조의 14세손. 시랑 간(諫)의 아들. 추밀원사(樞密院事), 이부시랑을 지냈다. 아내는 원주이씨 윤(允)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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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9~? 본관 이천. 자 희언(希彦). 호 기은(箕隱). 시조의 11세손. 중정대부 선(瑄)의 아들. 학문을 좋아하였고 20세에 등과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냈으며 홍문계(洪文繼), 송송례(宋松禮)와 함께 난을 토평한 공으로 기성군(箕城君)에 봉작되었다. 충렬왕 때 국정이 문란함을 보고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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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밀양. 시조의 28세손. 1683년 나주에서 함평읍으로 이거하여 밀양손씨 함평 입향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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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 본관 신평. 자 학열(學說). 호 영사정(詠四亭). 시조의 16세손. 만령(萬齡)의 아들. 효학 절의 겸비하였고, 1633년에 선무랑을 제수 받았은 후 승진하여 금천찰방(金川察訪)을 지냈으며 1637년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산수 풍월과 더불어 살았다. 유고집 1권이 전하며 아내는 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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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 본관 여산. 자 화업(化業). 시조의 22세손. 지윤(持潤)의 아들. 1800년경 무안에서 나산면 덕림리로 이거 하여 신평송씨 함평 입향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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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1597. 9. 23 본관 홍주. 호 화암(花菴). 아버지는 곤재 정개청 문하생 제민이며 어머니는 충주박씨다. 학교면 곡창리 사포에 집을 짓고 백일홍 나무를 많이 심어 세칭 “백일홍당(百日紅堂)”이라 하였으며, 대곡 마을 앞 득량골 벼랑에 현재까지도 층층이 쌓인 바위들이 있는데, 이 바위들을 해전(海戰)이 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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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1807 본관 평산. 처음 이름 성(晟). 자 여순(汝純). 시조의 27세손. 사량(思亮)의 아들. 통덕랑을 지냈으며 아내는 광산김씨 규탁(奎鐸)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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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 본관 평산.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진의 김수권 막하에 들어가 12월 말경 광교산(光敎山. 현 서울의 영등포 부근)에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1637년 1월 3일부터 5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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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1835 본관 평산. 자 성즙(聖楫). 시조의 28세손. 통덕랑 경록(慶祿의 아들. 순조조에 진사과에 입격하였으며 유고 3권이 전한다. 아내는 평택임(林)씨 천사 상렴尙濂)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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