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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1~1754 본관 함평. 자 농시(農始). 시조의 20세손. 주관(周觀)의 둘째 아들. 음사로 출사하여 판관(判官)을 지냈다. 아내는 함평이씨 지번(之蕃)의 딸, 진주정씨 진사 헌(櫶)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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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영조조(英祖朝), 자는 율경(栗卿)이니 정국(定國)의 아우이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형 정국과 함께 지방의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였고 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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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 목(穆)의 증손. 인후(仁厚)의 아들. 시호 문안공(文安公). 처음 이름은 관도(寬道)며 고려조에 수문전태학사 문하 시랑평장사(修文殿太學士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함풍군(咸豊君)에 군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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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정종조(正宗朝). 자 화여(華汝), 호 송촌(松村). 진사 성지의 후예로 육영재 태신의 아들. 자질이 범상치 않았고 효우(孝友)를 타고나 처세와 접인(接人)에도 뛰어나니 모두가 감탄하고 경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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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1568. 본관 광산. 자 영경(榮卿). 호 송계(松溪). 만의 21세손. 호군 상지(尙枝)의 아들. 뛰어난 조행(操行)과 기절(氣節)이 있어 부모상에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고 중종 9년(1514) 9월 1일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司成),남원부사(南原府使),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했는데 재직시 치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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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호 월봉(月峯). 만의 21세손. 첨사 시(偲)의 아들. 생원, 진사과에 입격한 후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으며 아내는 전의(全義) 이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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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시조의 24세손. 무과 급제 진충(盡忠)의 아들.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아내는 장택고씨 군수 진(震)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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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1636 본관 함평. 자 여건(汝建). 호 무민당(無閔堂). 시조의 17세손. 효자 철수(哲秀)의 맏아들로 중봉 조헌(趙憲)의 문하생이며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금산에 이르렀을 때 조헌이 이미 전몰한 뒤라 의병들을 이끌고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 한산, 노량 싸움에서 대첩을 거두는 전공을 세웠으며,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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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2세손. 목사 홍의(興義)의 아들. 방어사(防禦使)를 지냈으며 아내는 반남박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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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1792 본관 함평. 자 원서(元瑞). 호 경재(敬齋). 시조의 21세손. 속(涑)의 아들로 문학으로 이름 높았고 향도에서 여러 차례 천거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내는 함평이씨 동길(冬吉)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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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9세손. 문과 급제 유안(有顔)의 아들. 1419년(세종 원년)에 문과 (경연과-慶宴科)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홍문관 응교(應敎), 장령, 사간(司諫)을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에 이르렀는데 단종의 폐위에 불복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월악에 정자를 짓고 북망통곡하니 사람들이 그 정자를 사인정(舍人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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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노씨 시조(始祖). 생졸 년대는 미상이며 고려조에 삼가 현감(三嘉縣監. 현 경남 합천군에 있던 현)을 역임하였고 1126년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머 가수군(嘉樹君) 후에 함풍군(咸豊君 함평의 옛 이름)으로 이봉(移封)되었고 공신록을 하사받았다. 이에 후손들이 본관을 함평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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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 목의 아들. 고려조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역임하였으며 묘소가 광주(廣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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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4세손. 부사과 회명(懷明)의 아들. 성균관진사를 지냈으며 아내는 서흥(瑞興)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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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다른 이름 석관(碩寬). 시조의 11세손. 장사랑 안서(安恕)의 아들.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영암군 금정면으로 이거 정착하여 함평노씨 영암군 입향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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