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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고성. 자 공현(公玄). 호 우도재(憂道齋). 시조의 36세손. 이조정랑 원량(原亮)의 맏아들. 1471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동생 익경과 함께 1500년경 전북 고창에서 학교면 금송리에 이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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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1494 본관 광산. 자 공포(功圃). 호 지헌(芷軒). 시조의 21세손. 좌랑 경온의 셋째 아들.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아내는 한산이씨 정진(廷震)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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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1484 본관 광산. 시조의 21세손. 좌랑 경온의 둘째 아들. 병조좌랑을 지냈으며 아내는 언양김씨 정권(鼎權)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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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1481. 본관 광산. 자 희포(希圃). 시조의 21세손. 좌랑 경온(景溫)의 맏아들. 1438년 문과에 급제하여 종성부사를 지냈으며 사후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아내는 경주최씨 경렬(景烈)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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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영산. 충훈부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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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1900 본관 선산. 처음 이름 교환(敎煥). 자 상숙(尙淑). 호 양천(楊川). 시조의 32세손. 진용(振容)의 아들. 당세에 효성이 지극함이 인근에 널리 알려졌고 이를 기리기 위해 마을에서 충효문을 세웠다. 나주군지, 도지에 이 사실이 실려 있다. 아내는 전주리씨 돈희(敎希) 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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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순조조(純祖朝). 자 윤필(允弼). 호 수현당(守玄堂). 한평군 태을의 후손. 조연재 문인. 성리학을 전심하였고 문집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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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 본관 광산. 자 실지(實志). 호 농은(農隱). 시조의 31세손. 일성(日聲)의 아들. 문장과 학행이 뛰어났으며 주부를 지냈다. 아내는 창원황씨 목사(牧使) 신명(信明)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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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김해. 속(涑)의 맏아들. 숙종조 무과에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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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1571~? 자 중백(重伯). 호 죽촌(竹村). 시조의 26세손. 군수 경성(慶成)의 아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하생이며, 장사랑(將仕郞)으로 병자호란 때 아우 종지(宗智)와 함께 창의하여 청주(淸州)에 이르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 귀향하였다. 아내는 금성나씨 수사 체암 대용(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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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1675 본관 광산. 자 익언(益彦). 호 양곡(陽谷). 시조의 26세손. 효자 득지(得祉)의 아들. 통덕랑을 지냈으며 가난한 이웃을 많이 도우니 촌민들이 비를 세워 송덕하였다. 아내는 경주이씨 성(晟)의 딸, 인동장씨 천각(天角)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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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1598 자 자명(子明) 호 의두(依斗). 시조의 26세손. 주부 경록(景祿)의 아들로 벼슬은 통덕랑(通德郞)이다. 정유재란 때 장인 나치용(羅致用)과 의병을 규합하여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울둘목,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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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선산. 호 기은(箕隱). 시조의 19세손. 집의(執義) 석규(石圭)의 아들. 호조 정랑(正郞),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아내는 완산(完山. 전주)리씨 생원 지의(之義)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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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본관 상산. 태종조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태종의 경호를 담당했던 덕생(德生)의 양아들로 생부는 우생(佑生)이다. 세종조에 아버지 덕생의 은공으로 관직에 등용되어 봉직하던 중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거쳐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었다. 재직시 사민(士民)을 끔직히 아끼고 사랑함은 물론 농상(農桑)에 힘을 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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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1702 본관 상산. 호 최락당(最樂堂). 충간공 덕생의 9대손.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7세 때 어머니가 병이 나 위급하자 단지(斷指)하였고 돌아가신 뒤에 3년을 하루 같이 시묘(侍墓)하니 주위에서 증민(曾閔)의 효에 비길만하다고 하였다. 학문에도 뜻이 깊어 침랑 이유인(寢郞 李有仁)과 함께 성리학 연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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