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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1세손. 정랑 안충(安忠)의 맏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으며 증조 유안(有顔)으로부터 4세에 내리 문과에 급제하여 주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아내는 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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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675 본관 함평. 자 희급(希伋). 호 죽헌(竹軒). 시조의 18세손. 정랑 덕원(德元)의 맏아들. 병자호란 때 두 동생과 함께 창의하여 전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돌아와 임천에 묻혀 살았다. 아내는 면성(綿城) 박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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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시조의 25세손. 대방(大方)의 아들.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 동래부사,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아내는 경주이씨 현감 영배(永培)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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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1세손. 정랑 안충(安忠)의 둘째 아들.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아내는 김씨며 화순의 능주로 이거하여 함평노씨 화순군 입향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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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1547 본관 광산. 자 자양(自陽). 만의 20세손. 과의교위(科毅校尉) 언과(彦果) 의 아들. 성종 때 어회장군 행(行) 의흥위호군(義興衛護軍)을지냈으며 1490년경 아들 극창과 함께 광주시 우치에서 나산면 송암리 송계로 이거하였다. 아내는 보성김씨 병절교위 보남(寶男)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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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562 본관 광산. 만의 22세손 극창의 둘째 아들. 통덕랑을 지냈으며 아내는 상산김씨 덕신(德信)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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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임진왜란 때 금산 싸움에서 전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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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8세손. 신(愼)의 맏아들. 기장(機張)현감을 지내다가 함길도(咸吉道) 행궁의 시종을 자청하여 봉직하다가 타계하였다. 아내는 예천(醴泉)서씨 이며 묘는 나주시 문평면 마전동(麻田洞) 후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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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 본관 광산. 만(蔓)의 19세손. 진사 구경(九經. 1421 년생) 아들. 통덕랑을 지냈으며 1470년경 광주의 우치에서 월야면으로 이거 정착하여 광산노씨 함평 입향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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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2세손. 대호군 흥도(興道)의 아들. 성균관생원을 지냈으며 아내는 고양기씨(高陽奇氏)며 묘는 대동면 금곡리 마당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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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9세손. 현감 성안(成顔)의 아들. 성균관진사, 장락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나주시 문평면으로 이거하여 함평노씨 나주 입향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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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9세손. 생원 희안(希顔)의 아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용강현령(龍岡縣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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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1860 본관 함평. 자 군집(君執). 호 기은(箕隱). 시조의 24세손. 재익(在益)의 둘째 아들로 효심이 지극하였고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넣어드려 3일간 연명케 하였으며 효로 동몽교관을 제수받았다. 아내는 무안박씨 창정(昌鼎)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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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3세손. 방어사 돈효(敦孝)의 맏아들 가선대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으며 학교면 복천리에서 고창군 상하면으로 이거 청착하여 함평노씨 고창군 입향조가 되었다. 아내는 전주리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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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1875 본관 함평. 처음 이름 계원(棨源). 자 중평(仲平). 호 호은(湖隱). 시조의 24세손. 명신(命臣)의 양아들. 생부 상신(商臣). 씨족간의 돈목은 물론 굶주리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 행의(行誼)로 이름이 높았으며 이 사실이 무안, 함평지에 실려 있다. 아내는 파평윤씨 항(沆)의 딸, 의성김씨 대원(大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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