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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1581 본관 함평. 자 극화(克和). 시조의 15세손. 희찬(熙纘)의 셋째 아들. 그는 갓난아기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자랐는데 서모(庶母)를 섬기기를 친어머니 같이 하였으며 눈보라가 치는 추운 날에도 방죽 얼음을 두들겨 깨고 잉어를 잡아 어버이를 봉양하였고 아버지가 중병에 들어 사경을 헤맬 때 혈지(血指)로써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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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산. 시조의 23세손. 현령 원혁(元赫)의 아들. 성균관진사를 지냈으며 아내는 성주이씨 명성(命成)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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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1909. 3. 7 본관 함평. 자 황숙(黃淑) 시조의 26세손. 재범(在範)의 맏아들로 학교면 복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906~1907년까지 김태원 의병부대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1909년 3월 7일 무안군 일로 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순국하였다. 아내는 수성최씨 윤조(潤操)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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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5세손. 자 관중(寬仲). 진사 몽호(夢虎)의 아들. 선략장군 부장(部將)을 지냈다. 아내는 양성이씨 정랑 수의(守義)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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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3세손. 대호군 성지(誠之)의 아들. 내금위 보공장군 부사과(副司果)를 지냈으며 아내는 남양반(潘)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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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자 명지(明之). 호 경모재(敬慕齋)시조의 13세손. 구산(邱山)의 아들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아내는 창녕조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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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9세손. 일성(一聖)의 넷째아들. 통덕랑을 지냈으며 아내는 함평모씨 현감 세번(世番)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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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1세손. 사인 인호(仁浩)의 둘째 아들. 중직대부 용양위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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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1세손. 사인 인호(仁浩)의 셋째 아들. 통훈대부 소강절제사(所江節制使)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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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시조의 11세손. 봉사 인호(仁浩)의 맏아들. 통정대부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지냈으며 아내는 청주양(梁)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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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처음 이름 원기(元機). 시조의 15세손. 진사 팽홍(彭鴻)의 맏아들.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고 아내는 기계유(兪)씨 호인(好仁)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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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평. 자 달승(達承). 호 기호(箕湖). 시조의 14세손. 훈도 영(榮)의 아들로 성균관진사를 지냈으며 대동면 고시로 이거하여 그 후손이 번성했다. 아내는 함평이씨 판관 홍지(興枝)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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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1602 본관 함평. 자 언승(彦承). 호 괴정(槐庭) 시조의 14세손. 훈도 영(榮)의 아들로 1549년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묘는 옥산리 산 47 번지에 있다. 아내는 순천박씨 부사직 징(澄)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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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3. 함평모씨 시조. 시호 충정(忠正). 고양씨(高陽氏)의 먼 후손. 송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원부(元符) 때(1098~1100) 병부상서(兵部尙書)로 호북경서 선무사(湖北京西 宣撫使)를 겸직하던 중 금(金)나라 양(亮. 제4대왕)이 임안(臨安) 땅을 처들어 오자 3만 군대로 애산(崖山)에서 무찔러 승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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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19년 1586-1635 본관 함평. 자 위백(爲伯). 호 서은(西隱). 절충장군 익룡의 아들. 우계 성혼의 문인이다. 부친상을 당하여 천리 분상(奔喪)을 하였으며 성리학에 몰입할 뿐 과거 할 생각을 버리고 오직 후진양성에 힘쓰고 시(詩)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으며, 함평 명륜당을 대화로 옮길 때에 유림을 선도하였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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